2016년 10월 25일 화요일

흥선대원군 하야 원인,가계도 죽음,업적 쇄국정책

흥선 대원군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서울 출신.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南延君球)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12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박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된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습니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안동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조대비의 친조카 승후군(承侯君) 조성하(趙成夏)와 친교를 맺었다. 그리고 조대비와의 인척관계임를 내세워 조대비에게 접근해 장차 후계자 없이 승하할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兒名)을 지명하기로 묵계를 맺었습니다!!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받아들였다.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는 척족(戚族)의 세도를 봉쇄하고자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천거로 영락한 향반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안에서 고종의 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완화군(完和君)의 문제로 명성황후와 사이가 갈라져 일생을 두고 화합될 수 없는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장성해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을 움직여 대원군 축출 공작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873년 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문을 사전 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해 그는 하야(下野)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야 후 양주 곧은골〔直谷〕로 은거했지만, 대원군의 정권에 대한 집념과 민비에 대한 감정은 격렬하였다. 그 뒤 기회 있을 때마다 정계로의 복귀를 꾀해 물의를 빚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세도정치를 분쇄해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였다. 당쟁을 뒷받침하고 양반 토호들의 발호를 두둔하는 기관으로 화한 서원(書院)을 대폭 정리하였다. 탐관오리의 처벌, 무토궁방세(無土宮房稅)의 폐지, 양반·토호의 면세전의 철저한 조사와 징세, 무명잡세(無名雜稅)의 폐지, 진상제도(進上制度)의 폐지, 은광산의 개발 허용 등 경제·재정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경복궁 중수의 강행과 더불어 천주교도 박해는 그의 정치생명에 타격을 주었다.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에 흥미를 가지고 천주교도와의 제휴를 꾀한 일도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 가계도 부인 아내/자녀 아들 딸 확인

그러나 도리어 정적들에게 이용되어 정치적 생명을 위협받게 될 것을 염려한 그는 천주교도 박해령을 내려 전후 6년간(1866∼1872)에 걸쳐 8,000여 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대박해를 감행한 인물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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